[조광수 정치학박사의 중국이란 코끼리 다루기] 문화적 차이로 본 중국의 정치 외교

▶ 중국 이해의 키워드, 전통

중국은 전통의 두께가 참 두껍습니다. 전통이 뭐 그리 대단한 것이냐며 무시할 수 있습니다. 사실 당장 밥이 되고 떡이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전통은 그걸 공유하는 구성원들에겐 엄청난 문화적 긍지가 됩니다. 전통은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지혜의 축적이기 때문이지요. 당장 떡이 되고 밥이 되지 않더라도 차마 떡과 밥으로 계량할 수 없는 가치와 향기가 있는 것입니다. 은근한 자신감을 갖게 해주는 든든한 배경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중국이 우량한 전통을 가진 것은 그 자체로 자랑할 만하고 더욱이 그것이 지금껏 면면히 일상에 남겨져 있다는 사실에 이르면 놀랍고 부럽습니다. 그래서 중국은 과거에 대한 지식이 현재를 이해하는데 필수적입니다. 전통이 오래되었다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단절되지 않고 전승되어왔다는 게 더 중요합니다. 

이런 비교가 가능하겠습니다. 이집트의 경우, 중국보다 훨씬 오랜 문명을 자랑하지만 고대 문자 해독이 수월치 않습니다. 새로운 피라미드가 발견되어도 판별하기 어려워 고대 이집트와 오늘날 이집트 사이의 일체감이 중국과 비교해 더 끈끈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반면 중국의 고대 문헌은 현대인들이 해석하는데 별 어려움이 없습니다. 전승과 해독에서 세계 유일입니다. 

▶ 엄청난 양의 기록 문헌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우선 축적된 문헌자료의 분량이 엄청납니다. 기원전 8세기부터 근 250년 동안 월별로 중요한 사건들을 기록한 사서가 지금도 그대로 읽히고 있습니다. 『춘추』가 바로 그 책입니다. 기원전 1세기 사마천이 목숨 걸고 쓴 방대한 역사책 『사기』 또한 대대로 독자들을 발분케 하고 있지요. 이 기막힌 역사서에 수록된 숱한 에피소드와 고사 성어는 다들 익숙해 합니다. 이를테면 이런 사자성어들입니다. 곡학아세, 계명구도, 관포지교, 토사구팽, 낭중지추, 분서갱유, 배수지진, 사면초가, 주지육림, 다다익선, 구상유취 등인데, 익숙하지 않으십니까. 

역사서와 경(經) 그리고 자(子)와 문집 등 전적(典籍)의 분량이 글로벌 넘버원입니다. 청 건륭제 때 만든 『사고전서』에 수록된 것만 3504종, 7만 9000여 권입니다. 비슷한 시기 프랑스의 디드로가 주편한 『백과전서』의 44배나 됩니다. 

다음 그 내용이 현재에 생생하게 그대로 이해되고 적용되고 있습니다. 중국 외교를 이해하는데 『수호지』의 명장면인 무송이 호랑이 때려잡는 대목을 몰라선 안 됩니다. 우리에게 판소리가 있다면 중국엔 경극이 있는데, 무송타호(武松打虎)는 가장 인기 높은 대목이거든요. 경극의 이 대목이 관객의 환호를 들으려면 무송을 연기하는 배우와 호랑이를 연기하는 배우가 서로 실수 없이 다치지 않게끔 사전에 막 뒤에서 거듭거듭 충분히 연습해야 합니다. 중국 외교가 바로 그런 모습입니다. 막 뒤의 연기 연습을 중시하는 경극처럼 막 뒤의 비밀스런 접촉과 타협을 중시하는 게 중국 외교 스타일입니다. 뭔가 조성되기도 전에 일방에서 치고 나오거나 미리 발표하는 식은 장을 망치는 결과가 됩니다.

역사는 단순히 시간의 누적만이 아니라 기억의 축적입니다. 특히 문화적 기억입니다. 역사는 사회문화적 맥락에 따라 선택적으로 재구성되어 오지요. 중국이란 공동체는 그런 문화적 기억들을 공유하며 존속해 온 것입니다.

▶ 미국인 오랜 친구의 중국 평가

헨리 키신저를 아시지요. 외교가의 전설인 그는 1970년대 미중 수교의 기초를 닦았고, 데탕트라는 새로운 국제질서를 만드는 등 여러 공적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대통령 닉슨과 그의 이름을 합성한 '닉신저'란 신조어가 생겼을 정도로 명성을 누렸습니다. 올해 아흔 일곱 고령입니다만 지금도 미중 현안에 대해 의회 청문회에서 발언하고 대통령에게 조언하는 노익장입니다. 중국 지도자들은 키신저를 오랜 친구로 아주 귀하게 대우하게 있지요.

그가 2011년에 쓴 『중국 이야기』 프롤로그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오늘날의 리더가 천년 묵은 사건에서 전략적인 원칙을 이끌어내 국가적인 중대한 위업에 착수한다는 것, 혹은 그런 지도자가 자신의 암시가 지니는 중요성을 동료들이 모두 이해해 줄 것으로 기대할 만큼 자신감에 넘친다는 것. 아마도 다른 국가에서라면 상상할 수 없는 노릇이다. ..... 중국만큼 고대의 역사라든가 전략과 정치의 고전적 원칙에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자랑할 수 있는 나라는 많지 않다."

중국 정치의 핵심을 찌르는 과연 대가다운 통찰입니다. 키신저가 이런 결론을 내리기 전 든 예는 마오쩌둥이 인도와의 전쟁을 앞두고 지휘관들과 나눈 대화입니다. 마오쩌둥은 자신이 줄곧 해체해오던 고색창연한 전통에서 해결책을 구했고, 지휘관 누구나 고대 사례와 당시 중국의 전략적 긴급 사안이 지닌 연관성을 이해했으며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았습니다.

마오쩌둥이 언급한 역사적 사실은 중국과 인도 사이에 있었던 두 번의 전쟁입니다. 첫 번째 전쟁은 당나라 때인데, 치열한 전투를 치렀지만 전쟁 후 양국은 경제 종교 분야에서 왕성한 교역을 누리며 오랜 평화를 유지했습니다. 다만 인도를 무력으로 '쥐어박아' 협상 테이블로 데려와야 할 필요는 있었지요. 두 번째 전쟁은 700년 후 원나라 때인데, 인도 진입 후 10만 포로를 학살한 적이 있습니다. 마오쩌둥은 이번 전쟁에선 '절제와 기강'을 엄명했습니다. 군 지휘관들은 인도를 기습하여 엄청난 타격을 입힌 다음 통제선으로 물러났고, 심지어는 인도군의 중화기를 되돌려주기까지 하는 등 마오쩌둥의 뜻을 완벽히 이해하고 실천했습니다. 

▶ 일본 수상이 받은 대우

중일 수교 때의 일입니다. 저우언라이 총리와 다나카 가쿠에이 수상이 베이징에서 만납니다. 저우 총리는 중국 역대 가장 유능한 재상 셋만 들라면 조조와 제갈량과 함께 꼭 꼽히는 인물입니다. 불같은 카리스마에 엽기적인 낭만성까지 겸비한 마오쩌둥이란 희대의 1인자 옆에서 자모(慈母)의 리더십을 행사해 인민들로부터 '영원한 총리'란 애칭을 얻었지요. 

다나카 수상도 '서민 총리'로 국민의 사랑을 받은 건 마찬가지입니다. 학력도 없이 워낙 바닥에서부터 총리에까지 오른 입지전적 정치인이어서 '20세기 도요토미 히데요시'란 또 다른 별명이 붙었을 정도입니다. 다만 일본 정치의 후진성인 파벌정치와 금권정치의 상징으로 불명예스럽게 퇴진한 탓에 반면교사 역할도 했지만, 최근 20여년의 총리들과 비교하면 볼륨의 크기는 단연 압도적입니다. 

다나카를 만난 저우언라이는 "언필신행필과(言必信行必果)"라고 쓴 편액을 선물합니다. 문제는 그 글의 의미가 무엇인가이고, 그 뜻을 다나카가 현장에서 이해했냐 하는 겁니다.

우선 그 문장의 출전은 『논어』입니다. 자공이 묻습니다. "어떻게 해야 선비답다고 할 수 있습니까?" 공자가 답합니다. "자기의 행실을 부끄러워할 줄 알고, 외국에 사신으로 나가 임금의 명을 욕되게 하지 않으면 선비답다고 할 수 있다." 수기치인의 기반이 튼튼하고 외교와 같은 큰일을 감당할 역량까지 갖추었다면 가히 일류 선비라는 뜻입니다. 자공이 묻습니다. "그 아래 단계는 무엇인지도 감히 여쭙겠습니다." 공자가 답합니다. "온 집안에서 효성스럽다는 칭찬을 듣고, 온 동네에서 공손하다는 칭찬을 받는 사람이다." 집안과 지역사회에서 덕망으로 인정받는 정도면 이류 선비는 된다는 뜻입니다. 바로 공자가 강조했던 기본 덕인 효와 제의 실천입니다. 자공이 또 묻습니다. "그 아래 단계도 감히 여쭙고자 합니다." 공자가 답합니다. "말에 신용이 있고, 행동에서 맺고 끊음이 분명한 사람이다. 그 정도로는 옹졸해 보여서 소인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그 아래 단계는 된다." 

저우언라이가 다나카에게 준 편액이 바로 이 세 번째 대목입니다. 말이 미덥고 행동이 분명하면 군자와 소인의 경계이긴 하지만 그래도 삼류 선비는 된다는 뜻이지요. 수교를 위해 찾아온 일본의 수상에게 일류 선비도 아니고 이류 선비도 아닌 삼류 선비의 대우를 한 것입니다. 다나카가 그 뜻을 당장에 이해하고도 웃으며 받았다면 저우언라이보다 큰 인물일 테고, 몰라도 일단 선물이니까 소납했다면 교양 수준이 드러난 것일 테지요. 

▶ 다나카의 전력을 지적한 편액

일본은 전후 처리 과정에서 당시 타이완에 패퇴해 있던 장제스 총통에게 큰 빚을 졌습니다. 꼼짝없이 죽게 생긴 관동군 60만 명을 포로로 대우하여 먹이고 입혀 고스란히 일본으로 되돌려 보내 주었거든요. 8년 중일전쟁 기간 동안 아니 만주사변부터 치면 그 훨씬 이전부터 일본이 중국에서 저지른 만행을 생각하면 대인도 그런 대인이 없지요. 대인 장제스가 귀환시켜준 그 병력의 장정들이 곧 일본 부흥의 역군이 됩니다. 뿐만 아니라 자칫 독일처럼 분할 통치될 뻔 했던 신세를 장제스의 도움으로 면하게도 됩니다. 그런 연유로 일본의 원로 정치인 군인들이 오랫동안 타이완을 단체로 방문해 장제스에게 고마움을 표시했습니다. 그런 사정을 훤히 알고 있는 저우언라이는 다나카가 현실적 필요 때문에 타이완을 배신하고 중국과 수교를 서두르지만 깊이 신뢰하지는 않는다는 뜻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 중국 정치인과 지식인의 소양

중국 정치인들의 문인적 소양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칠언시나 오언시로 심사를 표현하는 건 일상입니다. 어느 고전에서 어떤 대목을 인용하며 자신을 변호하기도 하고 상대를 비난하기도 합니다. 못 알아들으면 등신 되는 것이고, 무슨 뜻이냐며 어리둥절하면 두 번 죽는 겁니다. 중국 공산당 지도자들은 그냥 사회주의자들이 아니라 전통의 훈도를 충분히 받은 사람들입니다. 전통주의와 사회주의가 묘하게 혼합되어 있지요.

고전을 인용해 의사를 은유적이고 함축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은 시진핑 시대에도 그대로입니다. 시진핑 주석이 박근혜 대통령을 항저우에서 만나 사드 배치에 관해 말할 때, 음수사원(飮水思源)이란 시구를 인용한 것도 같은 맥락이지요. 

▶ 김구 주석이 피신했던 항저우

"음수사원"은 남북조 시대 유신의 시 '징조곡'의 한 구절로 물을 마실 때 그 근원을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항저우는 예부터 산수가 빼어나고 미인이 많은 곳으로 유명한 고장입니다. "천상에는 천당이 있고, 지상에는 쑤저우와 항저우가 있다."란 말이 있을 정도지요. 

그 항저우는 김구 주석이 피신하며 머물던 곳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들 김신 장군이 항저우 방문 때 "음수사원, 한중우의"란 글을 남기기도 했지요. 김구를 비롯한 임정 요인들을 충칭까지 보호했던 지난날을 기억하자는 뜻으로 시진핑이 꺼낸 이야기입니다만, 사실 그다지 적절한 예는 아닙니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도운 주체는 중국 공산당이나 마오쩌둥이 아니라 국민당의 장제스였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그 중국이 이 중국이라고 우기면 할 수 없는 노릇이지만, 시진핑으로선 어떻게든 전거를 찾아 설득하고 싶었겠지요. 

문화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은 맥락이란 개념으로 문화현상을 설명하는데, 의사소통 방식의 차이로 '저맥락 문화'와 '고맥락 문화'를 구분했습니다. '저맥락 문화'는 직설적이고 명시적입니다. 직선형으로, 말하는 사람이 결론부터 내리는 식이지요. '고맥락 문화'는 암시적이고 함축적이며 은유적입니다. 나선형으로, 듣는 사람이 결론을 내리게 하는 식입니다. 그렇게 구분하면 중국은 한국보다 훨씬 고맥락 문화이고, 미국은 한국보다 훨씬 저맥락 문화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만 이 구분은 문화적 차이일 뿐 우열의 문제는 아닙니다.  <전 영산대 중국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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