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이섭 (田悧攝 / 1976~)

유치원생 딸의 질문, 그 두 번째

 최근에 일곱 살 딸의 두 가지 질문 중 한 가지 질문이랄까 요구사항이 "아빠 우리도 도시 아파트에서 살고 싶어요." 유치원 차를 타고 등ㆍ하원 길에 딸의 눈에 비친 키 큰 집, 또래 친구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아파트가 좋아보였나 보다. 유치원을 가지 않고, 어디 밖으로도 출타하는 일이 없는 날은 아이 둘 뿐인 시골마을에서 동생과 종일 보내야만 하는 현실이 어린 딸로서도 불만인가보다. 점점 초등학교 갈 시간이 다가올수록 아이의 교육환경을 위해서라도 밖으로 나가야하는 건 아닐까 고민이 따를 때도 있다.
 반대로 도시 아이들이 우리 집에 놀러오기라도 하면 "와~ 이런 곳에 살고 싶다." 소리가 나온다. 아파트에서 보지 못한 자연이며 놀이터와 우리 집의 구조 등 아이의 감각으로도 공기의 체감 자체가 다름에서 나오는 소리일 것이다. 물론, 어른들도 이런 소리를 때때로 하긴 하나 속으로는 "그래 한 번 시골에서 살아보면 그런 말 안하겠지?" 상대적으로 자기 주변에 없는 것에 대한 동경의 소리일 것이다. 그렇다고 현실에 살고 있는 내 집에 대해 부정 한다거나 여기를 떠나 도시에서의 삶을 바라는 건 절대 아니다. 
 지난 기사에서 다룬 첫 번째 딸의 질문이었던 `늙음과 죽음`에 대한 삶의 인식문제로 말미암아 인생 전체를 어떤 존재론적 사유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었다면, 이번의 질문으로는 피상적 고민보다는 현재 살고 있는 집과 내ㆍ외적인 관계를 가지며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인간학적 고민이다.
 볼노(O. F. Bollnow 1903~1991)는 「인간과 공간(Mensch und Raum)」에서 공간의 여러 관점들과 인간 삶의 공간성 등에 대해 이야기를 하며 특히 `안식처로서의 집`에서는 "인간에게는 뿌리를 내릴 중심, 공간 안에서 발생하는 모든 관계의 기준이 되는 중심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하며 세계 중심으로서의 집을 이야기 하고 있다. 안과 밖, 떠남과 돌아옴, 깨어남과 잠듦 등의 이동에서 그 긴장관계를 해소하며 과정의 중심이 되는 공간(집)을 유지하고 가꾸는 것이 중요하다 이야기 하고 있다. 
 더 좋은 집을 가지고 싶고, 더 좋은 지역으로 가서 살고 싶은 인간의 욕망은 어쩔 수 없겠지만, 그 이전에 집이라는 의미에 대해 생각하고, 그것의 가치와 나와의 관계, 그 안에 있는 것들의 가치를 더욱 빛나게 하는 것 등 철학적 의미를 생각해보는 것도 중요할 것이다. 
 한창 휴가철이다. 일상에서 벗어나 더위를 피해 산으로, 바다로, 계곡으로, 해외로 많이 떠날 것이다. 돌아오면서는 그곳에서의 즐거웠던 기억도 있겠지만, "그래도 내 집이 제일 좋고, 편하다."를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일상에서의 소소한 행복을 집을 통해 받아들이고 있음을 느껴보자. 

 

추억의 집

 도시로의 동경을 꿈꾸던 내가 부산, 서울, 도쿄의 도심으로 10여 년 째 떠돌며 공부할 때 긁적거렸던 글이다. 정확히는 2005년 이맘때 즈음의 글이다.

 「때때로 꿈을 꾼다. 어린 시절의 내 모습과 그 때 살던 집 구석구석이 생각난다. 너무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온 가족이 모여 식사를 하던 큰 방은 식사뿐만이 아니라 손님접대라든가 휴식의 다양한 용도로도 쓰였다. 가끔은 할아버지, 할머니 사이에 파고 들어가 잠을 자기도 했던 나의 유년시절, 그리고 큰 방의 벽장은 참 시원하고도 아늑했다. 흙냄새, 나무냄새도 나고 형과 나의 숨바꼭질 장소이기도 했다.
 큰 방 뒤로는 작은 방이 있다. 이른 아침부터 할아버지의 하루가 시작되는 장소로 항상 할아버지의 술과 일거리가 가득 했다. 겨울이면 새끼 꼬기를 자주 하셨고, 할머니는 이 곳에 화로를 놓고 떡을 굽거나 엿을 녹여 우리들의 입을 달콤하게 해 주셨다.
 안방과 작은 방으로 이어지던 대청마루는 길게 뻗은 소나무 판의 촉감이 일품이다. 가끔 대청소를 하는 날에 소나무 판 아래에 끼어있는 동전을 줍기라도 하면 공짜라도 생긴 냥 좋아 날뛰곤 했다. 여름이면 할머니 팔을 베개 삼아 더운 줄도 모르고 새록새록 잠들던 기억, 어머니로부터는 벌을 받던 장소로도 기억이 되는 곳이다. 갖가지 사건사고가 많았던 나는 이 곳에서 무릎 꿇고 의자를 들고 벌서며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 자주 울곤 했었다. 나 때문에 덤으로 형까지 벌을 받는 경우도 많았다. 
 대청을 지나 작은방으로 가면 큼지막한 아버지의 책상과 그 당시 드물었던 전화기와 영농잡지, 축산잡지가 꽂혀있던 책장, 곧장 작은 방의 뒷방으로 향하면 이 곳은 형과 함께 쓰던 방으로 우리들의 놀이터가 되고, 공부방이 되기도 했었다. 
 큰방의 뒷방과 작은방의 뒷방으로 연결되는 중앙에는 청방이 있다. 대청의 뒤쪽이다. 이 곳은 한여름에도 참 시원했다. 그래서 항상 먹거리들로 가득했던 천연냉장고였었다. 이 청방에는 다락도 있어 여러 물건들을 수납 하기에도 참 좋았던 것 같다.
 청방 뒤로는 다시 작은 툇마루가 있고, 군불을 지피던 아궁이와 동쪽으로는 할아버지의 갖가지 연장과 작업장이 있고, 서쪽으로는 부엌으로 이어지는 장독대가 늘어서있다. 장독대 앞으로 작은 배나무와 수돗가가 있는데 세탁기가 귀했던 그 시절에는 한 겨울에도 어머니는 이 곳에서 온 가족의 빨래를 해야만 했다. 부엌은 지금 생각해봐도 아주 컸었던 것 같다. 큰 아궁이와 가마솥이 두 개 있고, 큰방과 뒷방으로 음식을 들여놓는 찬장도 있었다. 집 뒤로도 큰 밭이 있어 갖가지 채소와 곡식들이 재배되어지고 식사 때가 다가오면 고추를 따러, 오이를 따러, 파를 뽑으러 심부름을 다니곤 했다.

1981년 마당에서 가족과 함께

 

 마당으로 나가보면 동,서로 큰 감나무가 두 그루가 있어 새들과 곤충들이 항상 있었고, 서쪽의 감나무 아래로는 부엌에서 쓸 땔감나무를 쌓아둔 나무더미가 가득했는데 주로 이곳에서 나의 회초리가 제공되어졌다. 어려서부터 장난꾸러기라 혼날 일이 많았는데 이 앞에서 울먹거렸던 그때의 기억들이 지금은 웃음을 짓게 한다. 
 마당은 고된 일의 피곤함에도 우리 형제들과 축구를 하며 놀아주던 아버지와의 운동장이 되고, 여름 저녁이면 과일을 한 가득씩 담아두던 대야들이 늘어서고 과일 판매처로 변신을 한다. 가을이면 타작을 하고 말리는 나락의 건조장으로 가을의 풍성함만큼이나 갖가지 곡식들이 늘어져 말려지고, 거둬들여졌었다.
 마당에서 대문으로 향하는 곳에는 또 다시 행랑채가 있다. 이 곳에도 창고와 외양간, 방 두 칸과 화장실이 두 개 딸려있다. 대문 쪽에는 축산에 몰두하시던 아버지의 병아리 사육장도 있다. 이 행랑채에도 큰 아궁이가 있고, 소죽을 끓이던 가마솥에서 형과 나는 물을 데워 목욕을 하고, 발가벗은 채로 내달려 안채로 뛰어다니던 모습이 새록새록하다. 이 곳의 창고에도 할아버지의 농기구들과 갖가지 연장들이 즐비하고, 섬뜩하게 뱀 한 마리를 온전히 넣어 술을 담그던 병들이 주르륵 천장에 걸려있다. 이 뒤쪽으로 두 개의 화장실이 있었는데 유독, 밤만 되면 화장실 가기가 겁난다. 거미도 붙어있고, 불을 켜기 무섭게 거꾸로 매달려있던 박쥐가 후드득 날아간다. 당시 인기리에 방영되던 `전설의 고향`을 보고 난 날이면 아침까지 용변을 참아야만 했었다.
 이 행랑채 앞으로 대문이 있고, 대문에는 홍룡사와 원효암으로 배달되어질 우편물이 노란 우체통에 담겨 있어 우리 집에는 손님들이 꽤나 잦았다. 대문 앞으로 꽃밭과 벌통과 누렁이의 집도 있다. 때때로 두꺼비가 찾아와 벌통 입구에 가만히 앉아 손쉽게 벌을 잡아먹곤 했다. 벌꿀을 딸 때는 신이난다. 갓 채취한 꿀맛은 정말로 꿀맛이다. 동쪽으로도 다시 작은 창고와 헛간이 있고, 쌀을 저장해 두던 뒤주도 있고, 빨랫줄도 걸려 있다. 그 시절에도 아버지는 우리 형제의 건강한 심신을 위해 이쪽에 탁구대를 마련해 주었고, 중학생이 될 무렵에는 농구대도 마련 해 주셨다. 동네 친구들이 놀러오면 모두들 부러워했었다.
 그러했던 집이 새로운 양옥으로 바뀌고 당시는 옛집의 소중함을 모른 채, 새 집에 산다는 기쁨만이 가득했었다. 어린 시절 추억이 구석구석 자리하고, 가족과의 사랑이 새록새록 묻어있고, 노동의 보람이 군데군데 새겨져있고, 사람이 산다는 향기가 온 가득 베여있던 그 집이 너무 그립다. 
 언젠가 다시 그 자리에 그 옛집의 향기가 묻어날 만치의 집을 짓고 살고 싶다. 그 예전의 할아버지, 할머니는 안 계시고, 젊던 아버지, 어머니도 이젠 중년이 되었지만 그 곳에서 나와 나의 미래의 가족들과 함께 사람의 향기가 묻어나는 삶을 즐기고 싶다. 집이란 단순히 먹고, 자고, 살기 위한 장소가 아니다. 가족애라는 이름의 보금자리인 것이다. 늘 그립다. 그 시절의 나, 그 시절의 사람들, 그 시절의 집, 모두가 추억이다.

 

 서른 해 전 아버지께서 지었던 그 집 위에 10년 전 귀향하고, 6년 전에는 내 집을 지어 살고 있다. 이제는 나의 또 다른 가족들과 함께 사람의 향기를 만들어 가고 있다. 
 과거의 내 삶에 있어서 집이라는 장소에서의 공간행동과 공간인식이 지금 현재의 내 삶과 사람됨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음이리다. 공간(空間)은 비어있는 공허함이 아니라 그가 믿는 세계관 속에 그의 존재를 확인하고 실천하는 곳이다.  

 

아파트 공화국

 환경(Eco)과 교육(Edu)을 합성한 신조어 `에코에듀` 아파트가 요즘 학부모들 사이에서는 중요한 집 선택의 기준 중 하나란다. 이미 `역세권`, `숲세권`이라는 용어로 아파트를 찾는 수요자들을 잡기 위해 건설사들은 광고를 해 왔었다.
 대부분의 사람들, 특히나 아이들에게는 `집^아파트`라는 인식이 보편적일 것이다. 우리나라에 아파트가 공급되기 시작했던 1970년대에 0.8%에 불과하던 비중이 이제는 열 명 중 여섯 명이 살 정도로 보편화되었으며 특히 최근 새로 짓는 주택의 90% 정도는 아파트일 정도로 대학민국 전체가 아파트공화국이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집 없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이 있으며, 또 내 집(아파트) 마련을 선망의 대상으로 여기며 하우스 푸어(House Poor)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다. 가계 소비 전체 지출액에서 식료품 지출이 차지하는 비율을 나타낸 엥겔 지수(Engel Index)와 더불어 빈곤의 척도를 파악하는 지표로 쓰이는 슈바베 지수(Schwabe Index)는 전체 지출 중 주거, 광열비가 25%를 넘기면 빈곤층으로 분류되는데 2010년 이후로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다.
 고대 로마제국의 인슐라(Insula)에서 기원하는 아파트(apartment)는 19세기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 신흥공업도시 위주로 극심한 주거난 해결을 위해 노동자들에게 양질의 주거를 제공한 주택이다. 유럽에서는 저소득층 공동주거 인식이 강한 아파트가 한국에서 성공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러한 집의 사회학적, 경제학적, 건축공학적 측면 외에도 인간학적 의미에서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 인간과 공간과의 관계 본질에서 생각해보는 실존적 공간으로서의 집 말이다.
 어느 지역의 어느 아파트 몇 동, 몇 호냐에 따라 정체성을 구별하는 무미건조하고 획일화된 집단주거, 재산의 증식과 상품가치, 계층 상승 및 사회적 성공 지표의 한 부분이 되어버린 집단주거 아파트가 효율성을 위해 비어있는 공간을 없애고, 말 그대로 `죽은 공간(Dead Space)`이 없는 LDK(Living, Dining, Kitchen)의 구조로 바뀌어갈 때 자기 존재를 스스로 침잠할 수 있는 공간을 잃어버리고 소외된 영혼, 가족이나 주변과의 죽은 관계를 양산해내는 집에서 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다음 호에서는 집을 지을 때의 `짓는다`가 무엇인지?, 사회적 공간(커뮤니티 시설)은 또 무엇일지?, 우리 양산지역의 집, 주거환경은 어떠한지? 그리고 내가 제안해보는 집짓기(커뮤니티 환경 만들기)에 대한 하나의 방법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가고자 한다. 

 물질적 가치는 멀리한 채 자연과 함께 안빈낙도하는 삶의 자세를 표현하고 있는 면앙정(?仰亭) 송순(宋純, 1493~1583) 의 시조 한 수로 맺어본다.

 

십 년(十年)을 경영(經營)하야 초려삼간(草廬三間) 지어내니, (십년을 계획하여 초가 삼간 지어 내니)

나 한 간 달 한 간에 청풍(淸風) 한 간 맛져 두고, (나 한 칸, 달 한 칸, 맑은 바람에 한 칸을 맡겨 두고)

강산(江山)은 들일 듸 업스니 둘러 두고 보리라. (강산은 들일 곳 없으니 둘러 두고 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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