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도 (동남문화관광연구소장.관광경영학 박사)

 천성산 미타암 석굴은 예로부터 기도 발 잘 받기로 유명하여 수도하던 다섯 비구가 서방의 극락세계로 날아갔다고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미타암 석굴은 신라시대 아미타불의 극락정토와 관련된 중요한 유적이다. 또한 석굴 내부에 봉안된 보물 제 988호인 석조아미타불(阿彌陀佛)은 신라 문성왕의 왕후가 병을 앓게 되자, 석굴에 부처님을 모시고 불공을 드리면 병을 나을 수 있다 하여 봉안하게 되었다는 일화를 지니고 있다.
 『삼국유사』 제 5권 피은(避隱) 제 8 포천산(布川山) 5비구(五比丘) 경덕왕대(景德王代)에 기록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경덕왕(景德王, 723년 ~ 765년, 재위: 742년 ~ 765년)은 신라의 제35대 왕이다. 성은 김(金)이고, 휘는 헌영(憲英)이며, 효성왕의 친동생으로 효성왕에게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왕위에 올랐다.
 "삽량주(삽良州)의 동북쪽 20리 가량 되는 곳에 포천산(布川山)이 있는데 석굴(石窟)이 기이하고 빼어나 마치 사람이 깎아 만든 것 같았다. 성명이 자세치 않은 다섯 비구(比丘)가 있었는데 여기에 와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외면서 서방정토(西方淨土)를 구하기 몇 십 년에 홀연히 성중(聖衆)이 서쪽으로부터 와서 그들을 맞이했다. 이에 다섯 비구가 각기 연화대에 앉아 하늘로 날아 올라가다가 통도사(通度寺) 문밖에 이르러 머물러 있는데 하늘의 음악이 간간이 들려 왔다. 절의 중이 나와 보니 다섯 비구는 무상고공(無常苦空 : 인생이 무상하고 괴롭고 공허함을 의미)의 이치를 설명하고 유해를 벗어 버리더니 큰 광명을 내비치면서 서쪽으로 가는 것이었다. 그들이 유해를 버린 곳에 절의 중이 정자(亭子)를 짓고 이름을 치루(置樓)라 했으니, 지금도 남아있다."
 천성산 미타암의 석굴 내부의 석조 아미타불(阿彌陀佛)은 신라 문성왕의 왕후가 봉안하였다고 전해지는데, 경주 안강에서 화강암을 운반해 와서 아미타불상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문성왕은 신라 제46대 왕(재위 839년∼857년)으로 신무왕의 아들이다.
 석조 아미타불상을 조성한 문성왕의 왕비와 관련한 『삼국사기』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문성왕 3년 가을 7월, 당나라 무종(武宗)이 조칙을 내려 신라로 귀국하는 관리로 이전에도 신라에 들어갔던 김운경(金雲卿)을 치주장사(淄州長史)로 임명하고 사신으로 삼았다. 신라왕을 책봉하고, 부인 박씨를 왕비로 봉하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문성왕 4년(서기 842) 봄 3월, 이찬 위흔(魏昕)의 딸을 왕비로 삼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따라서 미타암의 석굴에 석조 아미타불상을 조성한 문성왕후는 박씨 부인인지 이찬 위흔의 딸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문성왕의 왕비 책봉과 관련된 청해진 장보고 대사의 반란 사건이 있었다.
 정토(淨土)는 세속인이 살고 있는 사바(娑婆) 세계인 예토(穢土)와 대비되는 곳으로서 부정잡예(不淨雜穢)가 사라진 청정한 불국토(佛國土)이다. 자연 환경이 좋고 물질이 풍부하여 개개인의 인격 완성을 이루는데 도움이 되는 모든 환경과 조건을 갖추었으며, 부처가 마련한 큰 불도 수행의 도량으로 누구나 성불하여 지혜와 자비를 완전히 실현할 수 있는 곳이다.
 불경에서 말하고 있는 정토에는 미륵정토, 약사여래의 유리광 세계, 비로자나불의 연화장 세계 등 여러 가지가 있으나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서방 극락정토이다. 이러한 정토에 태어나겠다는 것이 정토신앙인데, 이는 대승불교의 보살사상에 근거한 것으로 부처의 본원력(本願力)에 의지하여 정토왕생하려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낙원을 정토로 지칭하며 부처, 보살이 가는 청정(淸淨)한 세상으로 곧 불교의 이상사회를 말한다. 이곳은 자연적 환경과 물질적 풍요를 누릴 뿐만 아니라, 누구나 자비와 지혜로 충만한 삶을 사는 사회라고 전해지고 있다.
 통일신라 이전의 신라는 불교를 왕권강화와 호국을 위한 수단으로 삼았다. 진골귀족들은 불교의 윤회사상을 자신의 신분과 그에 따른 혜택을 합리화하는 데 사용했다. 현세에서 부귀영화를 모두 다 누리고 있는 왕족과 진골귀족들의 경우에는 죽어서도 현실에서와 같은 생활이 유지되기를 바랐기 때문에 죽은 후 서방의 극락정토에 왕생하고자 하는 내세 신앙을 가지게 되었고, 미래불로서의 미륵을 믿는 `미륵신앙`으로서 그 성격이 현세적이고 세속적이었다.
 통일신라의 불교는 일반 백성들도 열심히 수도하면 아미타불의 정토에 왕생할 수 있다고 믿는 정토신앙(淨土信仰)이 대중화되었다. 가장 큰 역할을 한 분은 원효대사(元曉, 617~686)로 귀족불교의 고승으로 추앙받던 존재였으나 요석공주와의 인연을 맺고 설총을 낳아 스스로 파계승이 되었다. 백성 속으로 뛰어 들어가 노래로써 부처님의 말씀을 전달하였다. 민중들은 그를 통해 부처의 이름을 알게 되고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을 외울 수 있게 되었으며 누구나 열심히 불공을 드리면 극락정토로 왕생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정토신앙을 `염불에 의한 현신왕생의 신앙`과 `추선(追善)에 의한 사후왕생의 신앙`으로 구별한다. `염불에 의한 현신왕생의 신앙`이 현실을 부정적으로 보면서 현세에서의 삶이란 초월되어야 할 것으로 보아 서방극락에 현신왕생 하기를 바라는 반면, `추선에 의한 사후왕생`은 현세에서 편안한 삶을 누리고 사후 추선(追善)으로 사자(死者)의 정토왕생을 비는 것이었다.
 정토신앙이 대중화되는 데는 수많은 승려들의 교화활동이 큰 역할을 했는데, 『삼국유사』의 감통(感通) 편에 나와 있다. 문무왕 때에 광덕과 엄장이라는 중 둘이 있었는데, 두 사람은 서로 사이좋은 동무로 지냈다. 두 사람은 언제나 다짐하기를 "먼저 극락으로 가는 사람이 꼭 서로 알리도록 하자."고 했다. 광덕은 분황사 서쪽 마을에 은거하면서 신을 삼아 생계를 유지하며 처자를 데리고 살았다. 엄장은 남악(南岳)에 암자를 짓고 살면서 큰 규모로 농사를 지었다.
 평생 아내와 동침하지 않고 살면서 수도에 정진하여 극락세계로 떠난 광덕, 그의 친구로서 그의 아내와 정을 통하려 시도하다가 호된 꾸짖음을 듣고는 물러나 몸을 깨끗이 하고 뉘우쳐  한 마음으로 관을 닦아서 결국 극락정토에 왕생한 엄장의 이야기가 정토신앙을 잘 보여준다.
 천성산 미타암 석굴은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불교의 정토사상과 직접적 관련을 맺고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미타암은 원효대사가 창건한 이후 왕족과 귀족, 일반 백성들도 열심히 나무아미타불을 암송하고 지극정성으로 불공을 드리면 누구나 질병을 치유할 수 있고, 서방 극락정토로 극락왕생할 수 있다는 정토사상의 성지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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