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산(梁山)의 신라시대 지명인`삽량주`에 들어 있는`삽`은 삼국사기를 통틀어 딱 두 가지 경우에만 사용. 어떤 지역을 표시하는 지명으로 최고 존엄의 의미가 깃들어 있는 `삽`자가 쓰인 것은 고대 수장들이 하늘에 두고 맹세를 거행한,`삽혈의식`과 연관성 깊어. 결국 고대 양산지역이 `삽라군`으로 불린 것은 과거 가락국(금관국)과 신라의 삽혈의식이 수반된 신성한 동맹의 결과에 의해 탄생한, 다시 말해 신라와 금관국이 피로 맺은 혈맹을 기리기 위한 지역임을 암시.  

18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한양도성도(출처: 삼성리움미술관)

양산의 옛 지명인 `삽량주`는 삼국사기 등의 사료에 따르면 7세기경인 신라 문무왕 때에 설치된 것으로 나오고 있다. 그러나 양산지역에서는 삽량주라는 명칭이 삼국시대 5세기 때부터 양산을 대표하는 지명이라고 언급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삽량주라는 양산의 고지명이 뜻밖에도 역사적 팩트(fact)들끼리 사서(史書) 속에서 충돌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적 팩트의 충돌은 주로 삼국사기에 언급되어 있는 박제상 관련 사료 중 일부 때문이다.

삼국사기에 보면 신라 5세기 무렵 눌지왕 때의 인물인 박제상(朴堤上)이 삽량주의 간(干)이었다고 적고 있기 때문이다. 5세기 때의 인물인 박제상이 신라의 삼국통일 후인 7세기에 설치되는 삽량주의 간(干)이었다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제기 자체가 그간 양산지역에서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지금껏 5세기 때의 인물이 7세기 중반 이후에나 설치되는 신라시대 최고 지방조직에 해당하는 삽량주의 간으로 재직했다고 하는 아이러니가 아무런 정리 없이 통용되고 있다고 봐야할 것이다.  

다행히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이런 역사적 팩트 충돌로 불거진 불일치를 해소케 해주는 단서를 적고 있다. 삼국사기와는 달리 5세기 당시 박제상의 관직을 삽량주의 간이 아니라 `삽라군`의 태수로 적고 있기 때문이다. 초기 신라의 지방조직이 군현제를 실시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비춰보면 삼국유사의 기록이 더 타당한 것으로 여겨진다.

한양도성도(출처: 삼성리움미술관)

따라서 앞서 소개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사료를 토대로 양산 지역의 지명변천을 도식화해보면`삽라군→삽량주→량주→양주→의춘현→양산군`으로 지명 변천이 정리된다. 

사실 5세기 이전 현재 양산지역의 지명은 `삽라군`으로 불리었을 가능성이 대단히 크지만 앞서 언급한 삼국유사나 삼국사기 어디에도`삽라군`에 대한 사료는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므로 삽라군이라는 지명의 유래를 현재에 와서 알아낸다는 것은 추가적인 문헌자료나 금석문이 발견되지 않는 이상 거의 불가능에 가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사실 삽라군이라는 지명 유래에 대한 힌트는 지명에 등장하는 `삽`이라는 한자에 숨어 있다.

사실 지명을 연구하는 역사학자나 국어학자들 사이에서도 문제의 삽라군이라는 지명은 매우 미스터리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왜냐하면 삽라군에 쓰인 `삽`자는 현재 우리나라 지명중에서 과거 혹은 현재를 통틀어 그 지명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희귀한 한자에 속하기 때문이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를 통틀어도 쓰인 용례만 따진다면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매우 드물다.

`삽`으로 읽히고, 그 뜻은`맹세를 다짐하여 희생의 피를 마시다`이다. 제정일치의 영향이 비교적 뚜렷했던 시기라고 할 수 있는 삼국시대에 맹세를 다짐하며 공양물로 올려진 산 짐승의 피를 마신다는 뜻을 가진 한자를 지명에 넣었다면 이는 매우 특별한 경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삽혈의식`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한양도성도(출처: 삼성리움미술관)

삽혈의식이란 신 또는 이에 준하는 신성한 존재 앞에서 상호간의 맹세 시에 백마 따위의 살아 있는 제물을 잡아 그 피를 입술에 바르거나 마시는 과정을 통해 입술을 피로 물들인 후 서약을 반드시 지킬 것을 맹세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삽혈의식은 고대 중국사회를 비롯한 고대 동아시아에서 일반적으로 행해졌던 맹세 의식으로, 주로 국가 간 통치자들 사이에서 상호 맹세 과정에서 행해졌다고 연구되고 있으며, 대략 그 과정은 대략 어떤 산 위에 제단을 쌓고 엄선된 흰 백마 등의 신성시 되는 제물을 잡아 그 피를 서로 마시거나 입술에 피를 붉게 칠하고 서로 맹약을 다짐한 뒤 그 다짐을 적은 문서를 단 근처 땅에 묻는 과정이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러한 삽혈의식은 우리나라 사서에도 언급되고 있는데, 삼국사기 열전(列傳)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과 관련된 사료를 모은 견훤전에 보면 928년에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의 견훤이 보낸 서신의 회답을 통해 `이리하여 남방 사람들에게도 나의 덕이 크게 베풀어졌다. 그런데 맹세한 피가 마르기도 전에 그대가 흉악한 위세를 다시 부려서, 벌과 독충 같은 해독이 백성들에게 미치고, 호랑이와 승냥이 같은 행패가 전국을 몰아쳐서, 금성이 위험에 빠지고 왕궁에 혼란이 일어날 줄을 어찌 알았으랴?`라며 견훤이 고려와 후백제 사이에 맺은 동맹을 파기한 책임을 묻는 내용이 나온다. 이 내용을 통해서 고려의 왕건과 후백제의 견훤이 화친동맹을 맺을 때 삽혈의식을 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양도성도(출처: 삼성리움미술관) 현재의 청와대 경내

수장들이 제물을 잡아 그 피를 마시거나 혹은 입술에 피를 묻혀 하늘에 서로의 맹세를 다짐하는 `삽혈의식`은 삼국사기 열전 견훤전에 외에도 삼국유사에서도 찾아 볼 수 있는데, 그런데 삼국유사의 기록은 삽혈의식의 형식을 삼국사기보다 훨씬 더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 대목이 바로 삼국유사(三國遺事) 제2권 기이편(奇異)편에 실린 신라 문무왕과 백제 의자왕의 장남인 부여 융과의 맹세과정을 보여주는 기사다. 내용은 신라 문호(文虎武, 문무왕)왕이 즉위한 5년 665년 8월에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웅진성(熊津城)으로 가서 부여 융을 만나 단(壇)을 만들고 백마를 잡아 천신(天神)과 산천의 영(靈)에 제사를 지낸 뒤에 제물인 말의 피를 뿌리고 글을 지어 맹세했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맹세를 어긴 결과 역시 언급하고 있는데, 맹세를 정한 뒤에 이를 어기고 배반하면 신명(神明)이 이를 살펴서 백 가지 재앙을 내려 자손들도 키우지 못하고 사직(社稷)도 지키지 못하여 제사는 끊어져서 남는 씨가 없게 될 것이라며 강조하고 있다. 이를 통해서 삽혈의식은 매우 신성할 뿐만이 아니라 그 신성함을 바탕으로 맹세를 어길 시에는 맹세를 어긴 측에 혹독한 저주를 사주하는 주술적 의미까지 부여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삽혈의식은 당시 고대 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약속 이행 수단일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이외에도 삽혈의식은 조선시대에 치러졌다. 1455년 세조는 자신의 왕위찬탈에 동조하여 단종과 그를 지지하는 세력을 모두 제거하는 데에 공이 큰 핵심공신들을 모아 공신회맹제(功臣會盟祭), 즉 삽혈의식을 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양산지역의 고지명인 삽라군의 `삽`자는 어찌 보면 삼국시대 혹은 통일신라 시대의 관점에서 보자면 상당히 고귀한 한자 혹은 신성한 한자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 뒷받침 하는 것이 삼국사기 잡지(雜志)편에 등장하는 고구려, 백제, 신라 지역의 고지명 중에서 `삽`자가 쓰인 지명으로 양산지역이 유일하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삽라군`이라는 지명은 고대 삽혈의식과 비교해보면 분명 어떤 특별한 의미가 부여된 것이라고 봐야할 것으로 사료된다. 그러나 지금 현재로서는 그와 관련된 특별한 의미를 알 수 있는 직접적인 문헌관계 자료는 없는 실적이다. 다만 함께 쓰인 羅자를 통해서 그 의미를 어느 정도 유추해 볼 수는 있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삼국사기 잡지 지리편을 보면 통일전후 신라지역에서 `삽`자와 마찬가지로 `羅`자가 들어간 지역명 역시 전혀 없다. 이는 `羅`자가 `新羅`의 국가명에 쓰이는 때문일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산지역 고지명에 `羅`가 쓰였다는 점은 `삽라`라는 지명이 그 지역의 유래를 따른 것이 아니라 그 당시 벌어졌던 어떤 역사적, 혹은 국가적 사건에 의해 부여된 지명이라는 점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삽라`라는 지명의 원래 의미를 앞서 언급한 관계 사료를 참고하면 `삽혈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또 원래 삽혈의식이 단독이 아닌 반드시 상대방이 있어야 가능한 점을 고려하면 결국 복수의 `羅`가 `삽혈`을 했다는 것이 된다고 가정할 수 있을 것이다. 

삼국유사의 기록대로 김제상(金堤上, 삼국사기와는 달리 삼국유사에는 김제상이라고 적고 있다)이 삽라군 태수로 활동하던 A.D. 4세기에서 5세기의 시기는 금관국이 신라에 합병되기 이전에 속한다. 따라서 김해와 부산, 양산 일부지역을 세력권을 두고 있던 금관국과 신라는 당연히 서로 국경을 맞대고 있는 상황이었다. 바로 이 금관국의 지명을 삼국사기서는 `加羅` 혹은`南加羅`로 표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앞서 언급한 삽혈의식을 행한 복수의 `羅`란 바로 `新羅`와 `加羅`를 가리키는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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